티스토리 뷰

나는 김녕김씨 충의공파 27세손 이다. 나의 아들은 28세손이다. 파조 김문기 조상님의 흔적을 찾아가기 위해 가까운 대구의 '금회영정각'을 찾아간 내용의 글을 올렸었다. 제법 조회수가 많았다. 오늘은 해당 글에서 김녕김씨 충의공파는 맞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본인이 몇 세손인지 모른다는 내용의 댓글을 보았다. 그래서 나의 조상님 그리고 성씨의 뿌리를 알고 가는 의미에서의 글을 적어보려 한다. 될수록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해당 자료는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 공식 홈페이지 - kyoungch1.x-y.net/ ' 내용을 참조했다.

출처 -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 공식 영상

김녕김씨-충의공파-공식-홈페이지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 홈페이지(그림 클릭시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

 

 

김녕 지역의 연혁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誌)에 따르면 김녕(金寧 : 지금 金海)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十八년(四一)에 수로왕(首露王)이 九촌장(村長)의 추대(推戴)로 가락국(駕洛國)을 세운 뒤, 가야(伽倻) 금관국(金官國)등으로 국호(國號)가 바뀌었다가, 신라 법흥왕(法興王) 十九년(五三二)에 구해왕(仇亥王)이 신라에 부강(附降)하여 빈객(賓客)으로 예우(禮遇) 받은 뒤,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정하고 읍호(邑號)를 금관군(金官郡)으로 변경하였다. 그 뒤 문무왕(文武王) 二十년(六八○) 애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고치고, 경덕왕(景德王) 때에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二十三년(九四○)에는 김해부(金海府)로 고치고, 임해현(臨海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음에 다시 군(郡)으로 승격시키었다. 성종(成宗) 十四년(九九五)에는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하였다가 현종(顯宗) 三년(一○一二)에 금주군(金州郡)으로 고치었다. 그 뒤 원종(元宗) 十一년(一二七○)에는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충렬왕(忠烈王) 十九년(一二九三 : 동국여지승람에는 충렬왕 二년으로)에 다시 현(縣)으로 낮추었고, 충렬왕 三十四년(一三○八)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다 충선왕(忠宣王) 二년(一三一○)에 다시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김녕(金寧)의 읍호 변천   

가락(駕洛) ----------------------------      四一년
가야(伽倻) ----------------------------      四一년
금관(金官) ----------------------------   五三二년
임해(臨海) ----------------------------    九四○년
금주(金州) ----------------------------    九九五년
김녕(金寧) ---------------------------- 一二七○년
금주안동(金州安東) 분성(盆城 : 별호) ------ 一二九三년
김해(金海) ---------------------------- 一三一○년

고려사 지리지, 동국여지승람김해편(高麗史地理誌, 東國與地勝覽金海篇)

 

 

김녕김씨의 유래

 

 

시조대왕(始祖大王) 휘 알지(閼智)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新羅) 제四대 석탈해왕(昔脫解王) 九년(서기六五) 三월 四일 밤에 경주 금성(慶州金城) 서쪽 시림(始林 : 지금의 鷄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왕께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숲에서 닭이 우는 것을 이상히 여기시고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호공(瓠公)이 왕의 명(命)을 받고 시림(始林)으로 가보니 한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금(金) 빛의 궤(櫃)가 하나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께서는 곧 사람을 보내어 그 궤(櫃)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그 금궤의 뚜껑을 열어보니 궤 속에는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단정하고 비범(非凡)하였다. 왕께서는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시며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내려 주시는 아들 복(福)이 아니냐?” 하시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시었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대단히 총명(聰明)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났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그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金櫃)에서 나셨다 하여 김(金)이라는 성(姓)을 정해 주시었다. 그리고 그의 출생지인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나라 이름도 계림(鷄林)이라 고치셨다. 공(公)은 탈해왕(脫解王)의 태자(太子)로서 대보(大輔) 벼슬에 계셨으나 왕위(王位)를 박파사(朴婆娑)에게 양보하시었다. 뒤에 시조대왕(始祖大王)으로 추존(追尊) 되시었고, 이 후로 모든 후손들이 공을 시조(始祖)로 모시었으며, 신라국(新羅國) 五十六왕(王) 중 三十八왕(王)을 그 후손(後孫)이 차지하는 영광(榮光)을 누리었다. 그 비(妃)는 마정부인(摩貞夫人)인데, 석탈해왕(昔脫解王)의 왕자(王子)이신 각간(角干) 강조(康造)의 따님이시다. 우리 김씨(金氏)는 우리 시조(始祖)에 관한 사실(事實)을 앞에서와 같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여 설명 하지만 다소 다른 기록(記錄)들도 있으니 참고로 다음에 몇 가지를 들어 본다.   

 


1. 대보공(大輔公) 탄강기(誕降記) (三國遺事篇)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의 승려(僧侶)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중국(中國) 영평(永平) 三년(서기六○년, 脫解王 四년) 八월 四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리(月城西里)를 거닐고 있노라니 시림(始林)에 큰 빛이 보이고 자주 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곧게 내리더니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 궤(櫃)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그 궤에서 광채(光彩)가 나며, 그 나무 아래에서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니 왕은 기이(奇異)하게 여기시고 그곳으로 거동을 하시어서 그 궤를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옛날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일과 같이 그 궤 속에서 한 어린아이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왕께서 기뻐하시며 그 아이를 안고 대궐(大闕)로 들어오시니 그 길 양편에서는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축하하는 것이었다. 왕께서는 그 아이의 이름을 발한(勃韓) 말을 따서 알지(閼智 : 아기)라 짓고, 성(姓)을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김(金)이라 하였다. 그 후 좋은 날을 택하여 그 아기를 태자(太子)로 봉(封)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자란 후에 그 왕위(王位)를 박파사(朴婆娑)에게 양보하였다고 씌어 있다. 그리고 알지(閼智)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아서, 六대(代)만인 미추(味鄒)의 대(代)에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으니 신라김씨(新羅金氏)는 모두 휘 알지(閼智)의 후손(後孫)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휘 알지(閼智)는 대보(大輔)라는 왕 다음의 지위(地位)에 오르고 또한 대왕(大王)으로 추존(追尊)하여 태조대왕(太祖大王)이라고 불렸다고 하였다.

 


2. 휘 성한(星漢) 시조 설(始祖說)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수 백년 전 신라(新羅) 때 세워진 신라 문무왕(文武王) 비(碑)에는 문무왕의 시조는 문무왕의 十五대조(祖)인 성한왕(星漢王 : 추존)이라고 쓰여있고, 역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먼저 고려 태조(高麗太祖) 때 세워진 진철대사(眞澈大師 : 利巖) 비(碑)에도 계림김씨(鷄林金氏)인 진철대사는 시조가 성한왕(星漢王)이라고 씌어 있다. 그렇다면 김씨(金氏)의 시조를 성한왕(星漢王)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한왕은 문무왕(文武王)의 一五대조이시니 국사기에 휘 알지(閼智)의 아드님이신 세한(勢漢)과 동일인(同一人)이고, 삼국유사에 휘 알지(閼智)의 아드님으로 된 휘 열한(熱漢)과 같은 분이니 어쩌면 성한왕(星漢王)과 휘 알지(閼智) 대보공(大輔公)은 동일인일지도 모를 일이다.

 


3. 시조(始祖) 신인설(神人說)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金庾信) 조(條)에 보면 신라 사람들은 자기들을 소호 김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後裔)라 하며 성(姓)을 김 씨(金氏)라고 하였는데 김유신 장군(金庾信將軍)의 비문(碑文)에도 또한 김유신 장군은 헌원(軒轅)의 후예(後裔)이고 소호(小昊)의 사위라 하였으니 남가야(南伽倻)의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도 신라김씨(新羅金氏)와 같은 성(姓)이라고 하여 김 씨의 시조는 하늘사람(神人)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본 문무왕(文武王) 비(碑)도 성한왕(星漢王)이 하늘에서 온 신인(神人)이라는 입장(立場)을 취하였다. 이들은 모두 왕실(王室)의 선조(先祖)를 신격화(神格化) 하려는 정책적(政策的)인 것으로 보인다.

 


4. 성(姓)의 유래(由來)

중국(中國) 당(唐)나라의 정사(正史) 요, 송(宋) 나라 인종(仁宗)의 칙명(勅命)으로 구양수(歐陽修)등이 一○六○년 경(頃)에 편찬(編纂)한 신당서(新唐書) 신라전(新羅傳)에는 왕(王)의 성(姓)이 없고 이름만 있었다고 하였다. 또 김서룡(金西龍) 박사의 ‘신라사 연구(新羅史硏究)’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유리왕(儒理王) 九년에 六부(部)의 이름을 고치면서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정(鄭)씨 배(裵)씨 설(薛)씨 등의 성(姓)을 하사(下賜)하였다고 하지만, 최(崔)씨 설(薛)씨 등의 성은 신라 왕조(新羅王朝)의 선비들이 당(唐) 나라에 유학(留學)하거나 유학하려 할 때 성(姓)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당(唐) 나라에 있는 큰 성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고, 이(李)씨 정(鄭)씨 손(孫)씨와 같은 성은 신라 시대에는 없었던 성이라 하였다. 신라(新羅) 말(末) 고려(高麗) 초(初)까지는 일반적으로 성(姓)이 보이지 않고 정(鄭)씨 이(李)씨와 같은 성은 고려 중엽(中葉)부터 보이며, 왕실(王室)이 박(朴) 석(昔) 김(金)의 성을 붙인 것은 진흥왕(웅興王) 이후라고 했다. 신라에 한문화(漢文化)가 들어오기 전에는 성(姓)이 없었고, 신라 선비들이 당(唐) 나라로 유학(留學)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성이 생겼다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通說)이다. 이렇게 보면 대보공(大輔公) 때나 성한왕(星漢王) 때부터 김씨(金氏)라고 칭(稱)하였다고는 볼 수 없고, 그 후에 소급(遡及)하여 계통(系統)을 찾아 김씨(金氏)의 선조를 댄 것이라고 보이는데, 박(朴) 석(昔) 김(金) 삼성(三姓)이 동족(同族)이었거나 혹은 신라의 원시부족사회(原始部族社會)에 추장(酋長)과 부추장(副酋長)이 있었고, 몽고계(蒙古系) 고대사회(古代社會)에 부왕(副王)이 둘씩 있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패왕(稗王)의 문구(文句)가 보이는데, 추장(酋長)인 왕(王)과 부추장(副酋長)인 패왕(稗王)들이 박씨계(朴氏系) 석씨계(昔氏系) 김씨계(金氏系)에 각각 있었다. 그러나 김씨계(金氏系)는 성한왕(星漢王)이나 대보공(大輔公) 때에 벌써 세력이 확대되어 왕위(王位)의 물망(物望)에 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꼭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보공(大輔公) 이전에도 신라(新羅)에 김씨(金氏)가 왕족(王族)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피력(披瀝)되어 있는 바, 탈해왕(脫解王)의 전왕(前王)인 제三대 유리왕(儒理王)의 비(妃)가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대보공(大輔公)께서 탄강(誕降)한 해로부터 겨우 十五년 후에 등극(登極)한 파사왕(破娑王)의 비(妃)도 김허루(金許婁 : 추존 葛文王)의 따님이라 하였으니 대보공 이전부터 김씨(金氏)는 진한(辰韓)의 일국인 사로국(新羅)의 六촌(村) 중 우세한 부족으로 적어도 패왕(稗王 : 副王)인 갈문왕(葛文王) 등의 왕(王)의 칭호를 붙일만한 지위(地位)를 유지하던 중에 대보공이나 성한왕(星漢王) 때에 와서 그 세력을 넓히고 대대(代代)로 세를 키워 가며 왕비(王妃)를 배출(輩出)하다가 미추왕(味鄒王) 때에 이르러 왕위(王位)에 올랐으며, 차츰 중국의 왕실제도(王室制度)를 받아들여 신라왕실(新羅王室)로 하여금 김씨왕실(金氏王室)이 되게 하였다고 보여진다. 신라(新羅)는 처음에 경주(慶州) 지방에 여섯 부족(部族)이 그 주축(主軸)을 이루었는데 이를 六촌(村)이라 불렀다. 이병도(李丙燾) 박사의 한국사(韓國史 : 진단학회발행) 고대편(古代篇)을 보면 六촌(村) 중 김씨(金氏)의 부족은 사량(沙梁)지방에 있었는데, 이 사량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부인(夫人)인 알영(閼英)이 탄생한 알영정(閼英井)이 있는 곳으로 지금의 남천(南天) 북안(北岸)인 사정리(沙井里)를 중심(中心)한 곳이다. 그러므로 김씨부족(金氏部族)은 남천(南川) 이북(以北) 서천(西川) 이동(以東) 북천(北川 : 閼川) 이남(以南)에 위치하여 박씨부족(朴氏部族)의 급량(及梁)과 남북(南北)으로 대치(對置)하여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위 한국사(韓國史) 고대편(古代篇)에 김씨를 칭한 것은 임금 등 군장 대인(君長大人)의 뜻인 간(干) 감(邯) 금(今) 이사금(尼師今)등 금(錦 : 君長)의 뜻으로 그 음(音)을 따서 금(今)이나 김씨(金氏)라 한 것이라 한다.   

 


五, 혼인(婚姻)과 성(姓)

미추왕(味鄒王) 이전에도 왕족(王族) 김씨(金氏)는 처음에 박씨(朴氏) 석씨(昔氏)와 일족(一族)이었을지도 모른다 함은 앞에서 쓴 바이나 모계중심사회(母系中心社會)의 습속(習俗)이 남아 성골(聖骨)만이 왕에 오를 수 있었던 신라 초기에 있어서 미추왕(味鄒王) 이전의 박씨(朴氏) 왕이나 석씨(昔氏) 왕 중에 김씨(金氏)를 비(妃)로 맞거나 어머니와 할머니로 모신 분이 많으니 이는 더욱 분명해졌다. 이미 시조(始祖) 휘 알지(閼智)께서 대보공(大輔公)이 되시고 태자(太子)가 되시었을 때부터 김씨(金氏)의 위치를 알 수 있거니와 제五대왕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 朴氏)의 비(妃)인 사성부인(史省夫人)이 김씨요, 제六대왕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 朴氏)의 비(妃) 우례부인(憂禮夫人)도 김씨요, 제九대왕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 昔氏)의 어머니 지진례부인(只珍禮夫人)도 김씨고, 제十一대왕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과 제十二대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의 어머니이신 옥모부인(玉帽夫人)도 김씨이니 박혁거세(朴赫居世)이래 미추왕 전 十二왕 중 五왕이 어머니나 비가 김씨란 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김씨는 시조(始祖)이래 미추왕(味鄒王) 대(代)에 이르기까지 신라(新羅)의 대통(大統)을 잇는데 조금의 흠도 없었던 것이다.

 


6. 신라김씨탄강유허비문(新羅金氏誕降遺墟碑文) (번역문)

신라에 역사(歷史)가 없다 하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읽지 않기 때문이다. 신라는 박․석․김 三성이 나라를 세워 천년이 되었다. 계림은 알지(閼智) 공께서 탄생한 땅이다. 지금은 영남(嶺南) 경주부(慶州府)에 속(屬)하여 있다. 세상에 김씨는 알지공을 시조로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지명을 전하나 그 세대와 연혁(沿革)이 역사에 기록된 것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도 있다. 지금 그 비(碑)에 새기므로 대략(大略) 기록한다. 처음 탈해왕(脫解王)때 시림(始林)의 계명(鷄鳴)을 듣고 금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기가 들어 있었다. 왕이 수양하고 이름은 알지(閼智), 사성(賜姓) 김씨(金氏),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쳤다. 알지 七세손 미추(味鄒)가 조분왕녀(助賁王女)를 비(妃)로 삼았고 왕이 무자(無子)이기 때문에 미추(味鄒)가 대신 즉위하니 호는 이사금(尼師今)이요 김씨가 처음 즉위하였다. 미추부터 내물(柰勿) 실성(實聖)을 지나 눌지(訥祗)에 이르니 마립간(麻立干)이라 하고 국민에 우차(牛車)를 쓰게 하였다. 눌지가 돌아가니 아들 자비(慈悲)가 즉위하고 자비가 돌아가니 아들 소지(炤智)가 즉위하여 처음 시장을 세워 사방에 재물을 유통케 하였다. 소지가 돌아가니 아들 지증(智證)이 즉위하여서 사람들의 순장을 금지하고 주군(州郡)에 하명(下命)하여 권농(勸農)하고 소로 밭을 갈게 하였으며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방언(方言)인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을 왕(王)으로 개칭(改稱)하고 상복(喪服)을 제정(制定)하였다. 왕이 돌아가시니 지증(智證)이라 시호(諡號)하였다. 시호법(諡號法)이 이때 시작(始作)되었다. 왕자 법흥왕(法興王)이 즉위(卽位)하여 율령(律令)을 반포(頒布)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制定)하였다.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진흥왕(眞興王)과 진지왕(眞智王)을 지나 진평왕(眞平王)에 이르러 무자(無子)하니 딸 선덕왕(善德王)이 즉위하고 자제(子弟)를 당(唐)나라 국학(國學)에 입학(入學)시켰다. 선덕왕이 돌아가고 진덕왕(眞德王)이 즉위하니 진평왕의 아우(弟)인 국반(國飯)의 딸이다. 처음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백관복(百官服)을 입고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백제(百濟)를 치자고 청하였다. 또 스스로 태평송(泰平頌)을 지어 비단에 글을 짜서 바치니, 당고종이 가상히 여겼다. 처음으로 당년호(唐年號)를 쓰게 하였다. 진덕왕이 돌아가니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즉위하여 무열왕과 당장 소정방(唐將蘇定方)이 같이 백제(百濟)를 멸망시켰다. 무열왕이 돌아가니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고 영부인(令婦人)이 당병(唐兵)과 더불어 중국 의상(中國 衣裳)을 입고 같이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역법(曆法)을 반포(頒布)하고 백관사(百官司)와 주군(州郡)의 관인(官印)을 주조(鑄造)하였다. 문무왕이 돌아가고 왕자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예전(禮典)과 사장(詞章)을 청(請)하니 당무후(唐武后)가 길흉요례(吉凶要禮)를 사본(寫本)하고 문사(文詞)의 채집(採集)은 규계(規誡)에 걸려 五十권을 겨우 작성(作成)하여 하사(下賜)하였다. 신문왕부터 효소왕(孝昭王)을 지나 성덕왕(聖德王)에 이르러 처음 누각시계(漏刻時計)를 제조하고 효성(孝成) 경덕(景德) 혜공(惠恭) 선덕(宣德) 원성왕(元聖王)에 이르러 독서출신법(讀書出身法)을 제정하고 원성(元聖)부터 소성(昭聖), 애장(哀莊), 헌덕(憲德), 흥덕(興德), 희강(僖康), 민애(閔哀), 신무(神武), 문성(文聖), 헌안(憲安), 경문(景文), 헌강(憲康), 정강(定康), 진성(眞聖), 효공(孝恭)을 지나 경순왕에 이르러 고려(高麗)에 양국(讓國)하려고 하자 왕자는 불가(不可)하다고 간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과인은 고위(孤危)하여 세력이 나라를 지킬 능력(能力)이 없으니 무고한 국민들의 유혈참상을 참아 볼수 없노라” 하고 시랑 김봉휴(侍郞 金封休)를 보내 고려에 상서하여 신(臣)이라 칭(稱)하니 신라는 끊어졌다. 김씨는 三八왕이 五八七년을 지냈으니 박, 석, 두성이 나라를 세우고 지킨 후를 이어받아 가장오래 나라를 누렸다.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이때 점점 일어났다. 신라부터 당나라와 교통(交通)할 때 중국 사관법(中國史官法)이 생긴지 이미 오래고 동쪽은 벽지(僻地)로 문장(文章)이 없었다. 그 역사는 많으나 후에 전(傳)하지 못 하였다. 고려 김부식(金富軾)이 신라등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하였으나 대략(大略)을 기록(記錄)하고 학자들은 동국사(東國史)를 연구하지 않았으며 그 판본(板本)도 오래고 훼손(毁損)되어 세상에 남은 것이 드물어 식자(識者)들이 매우 근심한다. 남공철(南公轍)은 아마 영남에 있을 때 참봉 김성걸(參奉 金成杰)이 경주에서 와 뵈옵고 계림기적문(鷄林記蹟文)을 청(請)하니 좋다. 그 근본을 추구(推究)하고 원려(遠慮)함이라 계림은 확고(確固)하니 옳게 전하리라 사적(事績)은 계림보다 큰 것이니 어찌 옳게 쓰지 않겠는가. 공자(孔子)는 주(周)나라에서 탄생하고 은(殷)나라 사람이라 하고 스스로 미자(微子)의 후손(後孫)이라고 말하였다. 또 공자께서 이르기를 하은(夏殷)의 예(禮)는 내가 말할수 있으나 기송(杞宋)은 징험(徵驗)이 부족(不足)하다 하였으니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김씨가 사방(四方)에 흩어져 있어 헤어볼 수 없이 많은데 다 신라 알지를 시조(始祖)로 한다. 공자가 은(殷)나라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어찌 하은(夏殷)의 예(禮)를 말하고 기송(杞宋)은 문헌(文献)의 징험(徵驗)이 부족(不足)하다고 하였겠는가 후에 이 비문을 잘 읽어 보는 사람이 있으면 거의 알고 역사의 관계를 보충하리라.

비명(碑銘) : 울창한 저 계림은 왕을 이르킨 터이다 누가 감히 불경하리요, 내 명(銘)은 비(碑)에 있다.

조선 순조(朝鮮 純祖) 三년 계해(癸亥. 一八○三) 二월

가의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嘉義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대구도호부사규장각직제학지제교(大邱都護府使奎章閣直提學知製敎) 남공철(南公轍) 찬(撰)
통정대부경주부윤경상도병마절제사(通政大夫慶州府尹慶尙道兵馬節制使) 최헌중(崔献重) 서(書)

 

 

김녕김씨 본관의 사실

 

 

관조(貫祖) 휘 시흥(時興)께서 김녕군(金寧君)으로 봉군(封君) 받으신 김녕(金寧)이라는 지명(地名)은 지금의 김해(金海)인데, 그 김녕(金寧)은 관조께서 봉군 받으신 때를 고려 원종(高麗元宗)때라 볼때 다음 연혁(沿革)에서 보는바와 같이 그 二十년 후부터 금주(金州), 안동(安東), 분성(盆城)등으로 자주 바뀌다가 충선왕(忠宣王) 二년(一三一○)에 김해(金海)로 바뀌어 일관(一貫)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도 자연 그 당시의 지명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쓰게 되었던 것이다.   

한 편 시조(始祖)가 전혀 다른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후예들도 그 본관을 김해(金海)로 써오고 있었으므로 양 김씨(金氏)를 구별하기 위하여 사회에서 수로왕이 먼저라 하여 그 후손을 선김(先金)이라 하고, 김녕군(金寧君)이 나중이라 하여 그 후손을 후김(後金)이라 하였다. 그러나 같은 본관(本貫)을 쓰면서 오랜 세월을 지나, 양 김씨(金氏)의 후손들이 번창하여지자 여러 가지의 혼란과 복잡한 문제들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김녕군 후손들은 대종가(大宗家)를 중심으로 조선 헌종(朝鮮憲宗) 十五년(一八四九)과 고종(高宗) 二十一년(一八八四) 두 차례에 걸쳐 정부(政府)에 청원하여 예조(禮曹)의 비준(批准)을 받아, 관조(貫祖)께서 봉군(封君) 받으실 당시의 김해(金海)의 읍호(邑號)인 김녕(金寧)을 다시 찾아 본관(本貫)으로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통통신(交通通信)시설이 전무(全無)하던 그 시기에 전국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이 복관(復貫) 된지도 모른 채 겨우 비준(批准) 十년 후인 고종(高宗) 三十三년(一八九六)에 민적령(民籍令)을 만났으니 그 신고된 본관이 김해(金海)나 분성(盆城)이였던 분이 많았던 것이다.

 

 

김녕김씨 충의공파 - 파조 충의공 휘 문기

 

 

파조(派祖) 충의공(忠毅公) 휘 문기(文起)

 

선생은 관조(貫祖) 김녕군(金寧君) 휘 시흥(時興)의 八세손이신 증영의정(贈領議政) 휘 관(觀)의 맏아드님으로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忠北沃川君伊院面白池里)에서 출생 하시었다. 초휘(初諱)는 효기(孝起)이셨으나 과거(科擧)에 합격한후에 선생의 장인(丈人) 김효정(金孝貞)의 효(孝)를 피하여 문기(文起)로 개명(改名)하셨으며, 자(字)는 여공(汝恭)이시고, 호는 백촌(白村) 또는 마암(馬巖)이시다.

선생께서는 불과 十여세 때 어머니 옥천육씨(沃川陸氏)께서 돌아가시자 十여리나 되는 그 산소에 매일같이 성묘를 다니셨다. 성품이 악을 미워하셨고, 말씀을 잘 하셨으며, 기우가 굉대하셨다.

세종(世宗) 八년(一四二六)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자 곧 아버지 휘 관(觀)께서 세상을 뜨셨으므로 선생께서는 관직에 나아가실 것을 미루시고, 아버지 산소에서 三년간 시묘(侍墓)를 하시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공의 마을을 효자동(孝子洞)이라 불렀다.  

시묘를 마친 선생은 세종 十一년(一四二九)에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시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編纂)하심을 시작으로,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과 경상도아사(慶尙道亞使)를 거쳐, 세종 二十三년(一四四一)에는 경창부소윤(慶昌府少尹)이 되시어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와 문과시관(文科試官)도 겸임(兼任)하셨는데, 이때 왕명(王命)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頒布)를 앞둔 그 마지막 해석(解釋) 작업에도 참여하시었다.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 세종 二十七년(一四四五)에는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로 임명(任命) 되시었으나 때마침 계모(繼母) 순천박씨(順天朴氏)께서 세상을 뜨셨으므로 “十三세 때부터 계모의 손으로 자랐으니 그 상(喪)을 정성껏 치름이 그 은혜를 갚는 길이므로 벼슬을 내어놓는다”고 상소(上疏)하시었다. 그러나 그 한 달여 후에 다시 세종(世宗)께서 좌승지(左承旨)를 보내어 간곡히 당부 하시므로 선생께서는 더 사양 할 수가 없어 임지로 부임하시었다. 그 후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겸지병조사(兼知兵曹事),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시었다가 문종(文宗) 즉위(卽位) 후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등을 이어 맡으셨는데, 이 때 병약하시던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端宗)의 보호를 고명(顧命) 받으셨다.

문종 一년(一四五一)에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가셨다. 남들이 다 반대하던 둔전법(屯田法)을 실시하시어 큰 성과를 올리셨으므로 문종으로부터 친히 쓰신 칭찬의 글을 받으셨다.

단종(端宗)이 즉위(卽位)하신 이듬해인 단종(端宗) 一년(一四五三)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시어 다시 조정(朝廷)으로 돌아오셨다.

선생께서 함길도를 떠나시자 그곳 유림(儒林)들이 선생의 덕(德)을 기리는 생사(生祠)를 세웠으니, 도민(道民)들의 선생에 대한 추앙(推仰)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이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 영의정(領議政) 황보 인(皇甫仁)등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領議政)이 되는 정변(政變)을 일으켰고, 선생은 반수양파로 몰리었었다. 그 무렵에 함길도절제사(咸吉道節制使) 이징옥(李澄玉)이 반역(叛逆)의 난(亂)을 일으키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 난을 평정(平定)할 수 있는 사람은 함경도의 민심을 얻은 선생뿐이라 하여 선생을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로 임명하였다.

선생께서 채 임지(任地)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징옥은 종성부판관(鍾城府判官) 정종(鄭鍾)에 의하여 피살되었으므로 임지에 도착하신 선생께서는 그 뒷수습에 전력하시는 한편, 이징옥과 연루되었던 북방(北方)의 야인(野人)들을 다스리는데 최선을 다 하시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함길도에 계시던 단종(端宗) 三년(一四五五) 윤 六월 十一일에 영의정이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양위(讓位)라는 허울 아래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는 정변(政變)을 또 일으켰다. 이 때 함길도에서 단종 폐위(廢位)의 소식을 들으시고 쓰신 선생의 ‘방백한시(放白鷴詩)는 단종에 대한 선생의 단심(丹心)이 잘 나타나 있다.

왕이 된 세조(世祖)는 곧 선생을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문종(文宗)으로부터 단종(端宗)의 보호를 고명(顧命) 받은 바 있는 공께서는 세조를 임금으로 모실 수가 없었다. 한양(漢陽)으로 돌아오시어 단종을 복위(復位)시키는 거사(擧事)를 계획하시고 동지(同志)들을 규합(糾合)하시며 때를 기다리시었다.

세조 一년(一四五六) 四월에는 경회루(慶會樓)에서 무인(武人)들의 궁술대회(弓術大會)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선생은 문인(文人)이면서도 백발백중(百發百中)의 명궁(名弓)솜씨를 보이시어 세조(世祖)로부터 최고상(最高賞)을 받으셨다. 선생께서 문무(文武)를 고루 가추셨음을 실증(實證)한 일이라 하겠다. 마침 그 해 六월 一일에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迎接)하는 잔치를 베풀게 되었다. 선생은 이 날 현장에서 세조를 베고 단종을 복위시키는 거사(擧事)를 하기로 동지(同志)들과 결의하였다.

현장 책임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에게 맡기고, 운검(雲劒)인 성승(成勝), 박쟁(朴崝), 유응부(兪應孚)등은 세조를 베며, 선생 자신은 군(軍) 동원과 명신(明臣)들의 회유(懷柔)를 맡기로 하시었다. 그러나 당일에 돌연 운검(雲劒)을 폐(廢)하는 조치(措置)가 있었으므로 부득이 그 거사를 다음 기회(機會)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튿날 동지(同志)였던 김질(金礩)의 밀고(密告)로 모의가 탄로되어 동지들과 함께 선생께서도 체포되어 一주간(週間)의 모진 고문(拷問)을 받았다.

그러나 선생은 단종복위를 빙자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 것이라는 자백을 강요받고 부인한 외는 홀로 끝까지 입을 다물어 불복(不服)하시고, 六월 八일에 능지처사형(陵遲處死刑)을 받으시고 순절(殉節) 하시었다. 선생은 이 때 세상 사람들은 선생의 이 불복(不服)을 ‘열(烈)중의 열(烈)’이라 하고, 이로써 죽을 사람을 많이 살렸다고 칭송(稱頌) 하였다. 이 때 선생의 맏아드님 여병재공(如甁齋公) 휘 현석(玄錫)께서도 사형(死刑) 되시었고 휘 충립(忠立) 이하 손자님들은 모두 상주(尙州) 관아(官衙)의 노비(奴婢)로 정속(定屬) 되시었으며, 공의 배위(配位)와 며느님과 따님들은 모두 고관들의 노비(奴婢)로 보내지셨다. 그러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공주 동학사(公州東鶴寺) 초혼단(招魂壇)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 선생을 추모하는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이 조심스럽게 세워졌다.   

선생의 고향 옥천(沃川)에는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세워지고, 영동(永同, 당시는 옥천현)의 자풍서당(資風書堂)에서는 그 선진안(先進案)을 마련하며 선생을 머리에 기록하고 극구(極口) 추앙(推仰)하였으며, 선생의 고향 마을사람들은 그 마을 어귀에 단(壇)을 쌓고 선생의 제사를 지내더니 그 마을 이름도 ‘사단동(社壇洞)’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육신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일이니 그 당시 선비들의 선생에 대한 추모(追慕)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생께서는 재질이 뛰어나시고, 성품이 강직(剛直)하시고 활달(豁達)하며, 문무(文武)를 겸비하시고, 부정(不正) 비리(非理)를 용납(容納)치 않으시며, 청렴(淸廉)한 선비인데다, 언변(言辯)과 한어(漢語)에도 능(能)하신 실천력(實踐力) 있는 분이시었으니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신임을 크게 받으셨고, 세조(世祖)도 선생을 중히 쓰려고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숙종(肅宗) 二十四년(一六九八) 十一월 六일에 단종(端宗)께서 복위(復位)되시었다.

그에 힘입은 선생의 八세손이신 이휘(爾輝)공께서 숙종(肅宗) 四十三년(一七一七)에 선생의 신원(伸寃)을 호소(呼訴)하시다가 그 실현을 보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뜨시고 그의 장손(長孫)이신 정구(鼎九)공께서 이어 피 나는 노력을 하시더니 영조(英祖) 七년(一七三一)에 드디어 선생의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가 내리었다.

그러자 영월(寧越) 충신단(忠臣壇)을 비롯하여 종가(宗家)에는 부조묘(不眺廟)가, 금릉(金陵)에는 섬계서원(剡溪書院)이, 고향 옥천(沃川)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시흥(始興)에는 오정각(五旌閣)이 이어 건립되고, 영동(永同, 당시는 옥천현)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배향되시는 등 공을 추모(追慕)하는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이 의성 덕양서원(德陽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二十여 곳에 이어 건립되었다. 그리고 정조(正祖) 二년(一七七八)에는 공께 충의(忠毅)의 시호(諡號)가 내리고, 정조(正祖) 五년(一七八一)에는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세손이사(世孫貳師) 등의 증직(贈職)이, 정조 十五년(一七九一)에는 불천위(不遷位)가, 고종(高宗) 七년(一八七○)에는 충신 정려(忠信旌閭)의 왕명이 내리었다. 후손들이 선생을 파조(派祖)로 모신다.   

一九七七년에 서울특별시가 노량진(鷺梁津)의 사육신(死六臣) 묘역을 정화(淨化)하여 사육신  중 거기에 묘가 없는 분의 가묘(假墓)도 봉안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선생이 세조 때 가려진 사육신이라고 판정한 一九七七년 九월 二十二일자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의 결의에 따라 이듬해 一九七八년 五월 十八일 사육신 묘역에 선생의 가묘(假墓)를 봉안하고, 사육신공원 의절사(義節祠)에 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시었다. 그리고 여기에 힘 입은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二○○四년 七월 十六일에 노량진 선생의 묘 아래에 ‘사육신김문기선생기념관’을 건립하고 백촌선조의 영정을 모시는 한편 사육신현창비를 세웠다.   

삼가 선생의 생년(生年)을 살펴보건대 구보(舊譜)에는 생년의 기재가 없다가 一九○四년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 一三九九년생으로 기재되었으나, 미혼 때 문과(文科)급제한 사실, 소년등과(少年登科)한 사실, 순절(殉節)할 때 미혼(未婚)의 적출녀(嫡出女)가 있었던 사실 등을 고려할 때 一四一一년생으로 추정(推定)되기도 한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김봉비(金奉非) 본관은 선산(善山)인데, 이조판서 문정공(吏曹判書, 文貞公) 효정(孝貞)의 따님이시고 묘는 선산(善山)에 있다고 전하나 실전(失傳)이다.   

 


백촌(白村) 선조 복관작(復官爵) 송원(訟寃)

숙종(肅宗) 二十四년(一六九八)에 단종(端宗)께서 복위(復位)되시고,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된 모든 충신(忠臣)들이 착착 복관작(復官爵)되었다. 그러나 백촌 선생은 신원(伸寃)이 되지 않으므로 선생의 현손(玄孫) 휘 영시(永時)의 증손(曾孫)인 휘 이휘(爾輝) 공께서 영동 현감(縣監) 충청감사(忠淸監司)등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백촌(白村) 선조의 신원(伸寃)을 호소(呼訴) 하셨다. 그러나 몇 해가 가도록 아무런 반응(反應)이 없으므로 공은 숙종 四十三년(一七一七) 一월 十九일에 한양(漢陽)으로 올라가시어 통화문(通化門) 안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북을 쳤다. (신문고(申聞鼓)를 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때는 신문고제도가 폐지됐던 때임)

그러자 놀란 의금부(義禁府) 관원들이 공에게 태형(笞刑) 三十도를 치며 문초하였다. 그러자 공은 백촌 선조의 억울함을 세세히 호소(呼訴)하시었다. 그런데 이 사안(事案) 처리를 의금부, 형조(刑曹), 병조(兵曹), 예조(禮曹) 등으로 넘기더니 나중에는 충청 감사에게로 보내어 조사케하였다. 자기 부서의 소관(所管)이 아니라거나, 백촌(白村) 선조가 병자사화(丙子士禍)때 순절(殉節)하신 증거가 없다거나, 이휘 공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들이 그 이유이다. 공께서는 각 처로 다니시며 증거자료를 수집하여 자료로 제출하시고 일단 신원(伸寃)의 실마리를 마련하시었고, 숙종(肅宗)께서도 김감(金堪)의 예에 따라 신설(伸雪)하여 주라는 명(命)을 내리시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께서 한양(漢陽) 여사(旅舍)에서 갑자기 세상을 뜨셨으므로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를 받는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휘(爾輝) 공의 장손(長孫)이신 휘 정구(鼎九) 공께서 조부(祖父)의 뒤를 이어 나서시더니 영조(英祖) 七년(一七三一)에 영조께서 궁(宮) 밖 거동(擧動)을 하는 기회를 얻어 죽음을 무릎 쓰고 꽹과리를 치시었다. 그리하여 조부 휘 이휘(爾輝)께서 호소하셨던 사실을 드시고, 백촌(白村)선조의 억울함과 그 신원(伸寃)을 호소하시었다. 그러자 영조(英祖)께서는 이 해 三월 二十六일에 백촌(白村) 선조의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를 내리셨다.   

 


이휘공(爾輝公)의 격고송원(擊鼓訟寃)과 형조문안(刑曹文案) - 숙종四十三년(一七一七년) 역 문(譯文)

형조(刑曹)의 계목(啓目 : 계본에 붙이는 목록)은 지난 二월 七일에 병조의 계사(啓辭 : 죄를 논할 때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는 一월 十九일에 있었던 일인데, 충장위(忠壯衛) 김이휘(金爾輝)라는 사람이 통화문(通化門)으로부터 들어와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북을 치기에 몹시 놀라 유사(有司)로 하여금 붙들어다 죄를 다스림이 어떠합니까, 고 하였다. 왕이 윤허하였다.

그 윤허가 내렸기에 二월 十二일에 조사를 해보니, 충청도 영동(永同)에 사는 충장위 김이휘로서 나이는 六十七세인데, 지난 정월 十九일에 통화문으로 들어와 차비문 밖에서 북을 치기에 매우 놀랐습니다. 사유인즉 마지막으로 자백을 했지마는 처음에는 거역하여 사연이 나타나지 않아서, 일차로 三十도의 매를 치고, 호구(戶口)를 상고해 보니, 그의 입적(入籍)은 적실(的實)하였습니다. 이날 김이휘가 진술한 사연은 이러합니다.

“저는 망극(罔極)하게 원통한 사정은 七대조 문기(文起)에 관한 일이온 바, 도총관(都摠管) 문기(文起)는 바로 고 영의정 순(順)의 손자이고, 영의정 관(觀)의 아들로서 삼조(三朝)를 역사(歷事)하여 관위(官位)가 정경(正卿)에 이르렀습니다. 충효가 집에 전(傳)해왔고, 절의(節義)도 내력이 있었는데, 세조 二년 병자에 나라를 위해서 살신성인(殺身成仁)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사절(死節)한 육신(六臣)은(선생을 육신인줄 알지 못하고 말함) 모두 설원(雪冤)하였는데, 오직 저의 선조인 문기(文起)만이 아직 지하에서 원한을 풀지 못했으니, 자손으로서 마음 아픔이 어떠하겠습니까. 육신이 함께 살신(殺身)한 절의는 후세에 격려(激勵)가 될 것이므로 이에 조정의 대신들의 진달(進達)에 의해서 육신과 함께 죽은 三十二인을 모두 설원(雪寃)을 하여 그 절의가 현양(顯揚)되었으나, 저의 선조인 문기(文起)와 김감(金堪)은 다만 자손이 천미하기 때문에 원통한 사정이 조정에 진달(進達)되지 못하였습니다. 육신과 다 같은 사람으로서 혹은 설원(雪寃)이 되어 환하게 현양(顯揚)이 되고, 혹은 우울하게 황천에서 눈물을 머금고 있으니, 국가의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도리에서 어찌 차별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김감(金堪)은 그 내외의 후손들이 북을 치면서 소원(訴冤)함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육신(六臣)이 설원(雪寃)한 사례에 따라 그 관작(官爵)을 회복하고, 자손들이 정속(定屬)에서 벗어나고 군역(軍役)도 면제되고 몰수했던 토지도 돌려주었는데, 저의 선조 문기만은 아직 세상에 설원되지 못하여 지하에서 원통함을 안고 있으니, 식자(識者)의 통한함이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열읍(列邑)의 많은 선비들이 본도(本道)에 진정을 한즉 제사(題辭 : 관청의 결정문)에 ‘이후로는 변통(變通)할 수 없다’ 하고, 또 조정에 진정을 올려도 똑같은 제사였습니다. 

아! 저의 선조만 홀로 원통함을 품게 되었음은 실로 백세(百世)의 공론(公論)이오나, 초야(草野)의 잔손(殘孫)들이 호소할 곳도 없사옵기에, 고요한 가운데 번요(煩擾 : 번잡하고 시끄러움)하게 북을 쳐서 외람한 줄은 아오나, 원울(冤鬱)함에 격분(激奮)되어 그칠 바를 몰랐사오니, 신의 죄는 만만(萬萬)이옵니다.  

다행히 바라옵건대 천일(天日)이 소명(昭明)해서 복분(覆盆 : 엎어진 항아리)의 속에까지 비추어 주시와 저의 선조로 하여금 김감의 신원의 예에 의해서 육신(六臣)과 같이 현양(顯揚)이 되게 해 주신다면 성대(聖代)의 광명한 법전(法典)이 어찌 일시적으로만 아름다웁겠습니까. 백세(百世) 뒤에도 또한 광채(光彩)가 날 것입니다.  저의 위선(爲先)하는 성심(誠心)으로서는 죽어도 유감이 없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중 략(中略)

병조(兵曹)의 계목(啓目)에는 “김이휘의 격고(擊鼓)함이 도총관 김문기가 육신과 동사(同死)한 문적이 육신전에 실려있음에 의거해서 그의 명절(名節)을 현양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하려 함인데, 김감(金堪)의 자손이 신원한 예에 의하여 같은 은전을 받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격고하는 일은 형조에서 주관하지 못하고 의금부(義禁府)로 이관하니 의금부에서 품의한 것입니다. 김문기가 육신과 동사한 충절이 이처럼 명백한데도 아직 신원하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한 것은 자손들이 잔미하여 호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땅히 김감과 같이 신원하도록 처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은전에 관한 것이니 하부에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재가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계(啓)하되 “회계(回啓)대로 시행하라고 명령하였기에 김이휘의 선조 문기를 김감의 예에 의해서 관작을 회복하고, 그의 정속(定屬)된 자손이 군역과 내외자손들 가운데 노비가 된 사람이 있으면 면제하고, 몰수한 토지도 다 해제해서 일체를 돌려 줄 것을 이미 결정했습니다. 김문기의 내외자손들과 원근친척들의 소정(所定)한 군역은 의금부의 상답(上答)한 공문의 사의(辭意)에 의해서 일체를 처리하여 윤허를 받은 뒤에 의금부에서 이미 반포(頒布)하였은즉, 마땅히 상세히 알아서 거행하겠으며, 김문기가 이미 신설(伸雪)이 되었은즉 그 자손이 군역에 소속된 자는 자동으로 면제되는 중에 판정을 내리신대로 처사(處事)하옵는데, 그의 주거지로 이관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김녕김씨 계보 (사진)

 

김녕김씨-계보-첫번째
김녕김씨-계보-두번째
김녕김씨-계보-세번째
김녕김씨-계보-네번째

 

 

■ 김녕김씨 분파도

 

김녕김씨 분파록(金寧金氏分派錄)

No 파  명 파조휘
관조시세
파조관직(派祖官職)
영사공파(領事公派) 준(遵) 十세 대광보국숭록대부돈녕부영사(大匡輔國崇祿大夫敦寧府領事)
목사공파(牧使公派) 형(硎) 十세 통정대부진주목사(通政大夫晋州牧使)
충정공파(忠貞公派) 준영
(俊榮)
十三세 대광보국숭록대부,분성군,충정공
(大匡輔國崇祿大夫,盆城君,忠貞公)
영광군수공파(靈光郡守公派) 대영
(大榮)
十三세 통훈대부영광군수(通訓大夫靈光郡守)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후영
(後榮)
十三세 통정대부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
동지사공파(同知事公派) 희영
(希榮)
十三세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
진천군수공파(鎭川郡守公派) 석종
(錫宗)
十二세 통훈대부진천군수,증가선대부병조참판
(通訓大夫鎭川郡守,贈嘉善大夫兵曹參判)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희간
(熙看)
十二세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충경공파(忠敬公派) 경세
(景世)
十五세 증자헌대부병조판서,충경공
(贈資憲大夫兵曹判書,忠敬公)
一○ 서윤공파(庶尹公派) 여택
(礪澤)
十세 조봉대부한성부서윤(朝奉大夫漢城府庶尹)
一一 주부공파(主簿公派) 위거
(渭巨)
十세 선교랑장악원주부(宣敎郞掌樂院主簿)
一二 유수공파(留守公派) 안도
(安道)
九세 자헌대부광주유수(資憲大夫廣州留守)
一三 현감공파(縣監公派) 정필
(廷弼)
十五세 통훈대부양지현감(通訓大夫陽地縣監)
一四 충숙공파(忠肅公派) 흔(欣) 十五세 증자헌대부병조판서,충숙공
(贈資憲大夫兵曹判書,忠肅公)
一五 송암공파(松菴公派) 질(秩) 七세 봉선대부소부감소감,호 송암
(奉善大夫少府監少監,號松菴)
一六 만은공파(晩隱公派) 길상
(吉祥)
九세 통훈대부삼척부사,호 만은
(通訓大夫三陟府使,號晩隱)
一七 충의공파(忠毅公派) 문기
(文起)
九세 자헌대부공조판서,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충의공
(資憲大夫工曹判書,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忠毅公)
一八 진사공파(進士公派) 정기
(鼎起)
九세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一九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지(智) 八세 가선대부성균관대사성(嘉善大夫成均館大司成)
二○ 분성군파(盆城君派) 응수
(應壽)
十四세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분성군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盆城君)
二一 생원공파(生員公派) 보철
(輔哲)
七세 참봉(參奉)
二二 좌승선공파(左承宣公派) 계저
(繼儲)
六세 정순대부밀직사좌승선(正順大夫密直司左承宣)
二三 전서공파(典書公派) 명로
(命路)
四세 정순대부전법사전서(正順大夫典法司典書)
二四 판사공파(判事公派) 극원
(克元)
三세 정순대부판전농사사(正順大夫判典農司事)
二五 판서공파(判書公派) 전(銓) 九세 자헌대부병조판서,충정공(資憲大夫兵曹判書,忠貞公)
二六 도순찰사공파(都巡察使公派) 문제
(文薺)
五세 광정대부전라도순찰사(匡靖大夫全羅道巡察使)
二七 충민공파(忠愍公派) 인찬
(仁贊)
九세 증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행중추원사,익화군,충민공
(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行中樞院使,益和君,忠愍公)
二八 상서공파(尙書公派) 문희
(文熙)
五세 정순대부이부상서(正順大夫吏部尙書)
二九 시랑공파(侍郞公派) 문백
(文伯)
五세 봉상대부예부시랑(奉常大夫禮部侍郞)
二○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문엽
(文燁)
五세 봉상대부보문각직제학(奉常大夫寶文閣直提學)
三一 참찬공파(參贊公派) 문강
(文江)
五세 정순대부판사농사경겸서연참찬관
(正順大夫判司農寺卿兼書筵參贊官)
三二 부윤공파(副尹公派) 문해
(文海)
五세 검교개성부부윤(檢校開城府副尹)
三三 부승선공파(副承宣公派) 극준
(克俊)
三세 정순대부추밀원부승선(正順大夫樞密院副承宣)
三四 승선공파(承宣公派) 극중
(克重)
三세 정순대부밀직사승선(正順大夫密直司承宣)

 

 

■ 김녕김씨 항렬도

 

충의공(忠毅公) 휘 문기(文起)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溶○
용○
○權
○권
炯○
형○
○圭
○규
鎭○
진○
○淵
○연
楨○
정○
○燁
○엽
在○
재○
○鎬
○호
汶○
문○
○模
○모
炳○
병○
○基
○기
鍾○
종○
○洙
○수
東○
동○
○燮
○섭
埰○
채○
○鉉
○현
洸○
광○
○柱
○주
炫○
현○
○奎
○규
鍊○
연○
○泰
○태
秉○
병○
○烈
○열
址○
지○
○鍵
○건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泳○
영○
○根
○근
熺○
희○
○坤
○곤
銅○
동○
○洛
○락
來○
래○
○炅
○경
   
浚○
준○
○柄
○병
煥○
환○
○埈
○준
鏞○
용○
○漢
○한
柄○
병○
     
浩○
호○
○相
○상
熙○
희○
○均
○균
鈺○
옥○
○永
○영
       

 

 

영사공(領事公) 휘 준(遵)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廷(정) 季(계)○ ○炯(형) 基(기)○ ○錫(석) 永(영)○ ○彬(빈) 炳(병)○ ○均(균)
○珍(진)
鍾(종)○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汶(문) 東(동)○ ○炫(현) 重(중)○ ○鍊(련) 洪(홍)○ ○根(근) 容(용)○ ○圭(규) 兌(태)○

 

 

진주목사공(晋州牧使公) 휘 형(硎)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煥(환) 會(회)○ ○鎭(진) 淇(기)○
泰(태)○
○來(래) 然(연)○ ○珏(각) 兌(태)○ ○漢(한) 震(진)○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南(남) 正(정)○ ○善(선) 海(해)○ ○柱(주) 炳(병)○ ○敎(교) 鍊(련)○    

 

 

충정공(忠貞公) 휘 준영(俊榮)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相(상) ○燮(섭) 喆(철)○ ○鍾(종) 洙(수)○ ○植(식) 炯(형)○
      ○秉(병) ○煥(환) 基(기)○ ○鎬(호) 淳(순)○ ○東(동) 南(남)○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培(배) 容(용)○ ○浩(호) 榮(영)○ ○烈(렬) 元(원)○ ○鉉(현) 海(해)○    
○均(균) 錫(석)○ ○淵(연) 柱(주)○ ○熙(희) 圭(규)○ ○鎭(진) 洛(락)○    

 

 

충경공(忠敬公) 휘 경세(景世)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煥(환) 會(회)○ ○鎭(진) 洪(홍)○ ○來(래) 然(연)○ ○珏(각) 兌(태)○ ○壬(임) 震(진)○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南(남) 正(정)○ ○善(선) 海(해)○ ○柱(주) 炳(병)○        

 

 

광주유수공(廣州留守公) 휘 안도(安道)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鍵(건) 澈(철)○ ○杓(표) 燁(엽)○ ○坤(곤) 鎬(호)○
        ○鐸(탁) 淵(연)○ ○采(채) 黙(묵)○ ○址(지) 鏡(경)○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澧(례) 權(권)○ ○燮(섭) 倍(배)○ ○鍍(도) 浩(호)○ ○根(근) 燦(찬)○ ○敎(교)  
○淳(순) 桓(환)○ ○炳(병) 在(재)○ ○鉉(현) 泳(영)○ ○模(모) 泳(영)○ ○城(성)  

 

 

송암공(松菴公) 휘 질(秩)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永(영)○ ○稙(직) 煥(환)○ ○周(주) 鍾(종)○ ○旿(오) 朝(조)○ ○溶(용) 相(상)○ ○燮(섭)
永(영)○ ○根(근) 炳(병)○ ○禧(희) 善(선)○ ○昭(소) 明(명)○ ○濬(준) 柱(주)○ ○烈(열)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建(건)○ ○準(준) 復(복)○ ○赫(혁) ○增(증)          
正(정)○ ○承(승) 來(래)○ ○魯(로) ○書(서)          

 

 

만은공(晩隱公) 휘 길상(吉祥)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聖(성) 浩(호)○ ○鉉(현) 淵(연)○ ○權(권) 炳(병)○ ○圭(규) 鎭(진)○ ○淳(순) 柱(주)○
○在(재) 錫(석)○ ○浩(호) 相(상)○ ○煥(환) 奎(규)○ ○圭(규) 鎭(진)○ ○浩(호) 楨(정)○
                洪(홍)○ 柱(주)○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晙(준) 在(재)○ ○鎬(호) 源(원)○ ○桓(환) 熙(희)○ ○增(증) 錫(석)○    
○暉(휘) 基(기)○ ○鍊(련) 洙(수)○ ○模(모) 熏(훈)○ ○均(균) 鍾(종)○    
○暻(경) 址(지)○ ○鎔(용) 河(하)○ ○栢(백) 烈(렬)○ ○培(배) 鈺(옥)○    

 

 

대사성공(大司成公) 휘 지(智)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洪(홍) 秉(병)○ ○烈(렬) 奎(규)○ ○欽(흠) 泳(영)○ ○休(휴) 熙(희)○ ○坤(곤) 鎬(호)○
○翼(익) 柱(주)○ ○烈(렬) 奎(규)○ ○鐥(선) 雨(우)○ ○杓(표) 勳(훈)○ ○均(균) 鍊(련)○
○漢(한) 東(동)○ ○煥(환) 埈(준)○ ○鉉(현) 洙(수)○ ○柄(병) 然(연)○ ○在(재) 鎭(진)○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淵(연) 來(래)○ ○炫(현) 載(재)○ ○鍊(련) 溶(용)○ ○杰(걸) 炅(경)○    
○洙(수) 相(상)○ ○燮(섭) 老(노)○ ○鎔(용) 永(영)○ ○柱(주) 炳(병)○    
○浩(호) 根(근)○ ○熺(희) 址(지)○ ○鉛(연) 源(원)○ ○株(주) 烘(홍)○    

 

 

판서공(判書公) 휘 전(銓)파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三三세
東(동)○ ○黙(묵) 基(기)○ ○鎔(용) 泯(민)○ ○桓(환) 炅(경)○ ○埈(준) 錡(기)○ ○津(진)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四三세
槿(근)○ ○炫(현) 坪(평)○ ○錫(석) 澤(택)○ ○栽(재) 炳(병)○ ○垣(원) 錄(록)○ ○沅(원)

 

 

도순찰사공(都巡察使公) 휘 문제(文齊)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溶(용)○ ○權(권) 炯(형)○ ○圭(규) 鎬(호)○ ○淳(순) 種(종)○ ○熙(희) 均(균)○ ○銖(수)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洪(홍)○ ○休(휴)                

 

 

충민공(忠愍公) 휘 인찬(仁贊)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廷(정)○ 學(학)○ ○朝(조) ○稙(직) 顯(현)○ ○遠(원) 鎬(호)○ ○泳(영) 秉(병)○ ○煥(환)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載(재)○ ○鍾(종) 泰(태)○ ○相(상) 容(용) ○圭(규) 錫(석)○ ○洙(수) 羲(희)○ ○燮(섭)
四三세                  
基(기)○                  

 

 

상서공(尙書公) 휘 문희(文熙)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溶(용)○ ○權(권) 炯(형)○ ○圭(규) 銑(선)○ ○洙(수) 柱(주)○ ○煥(환) 垠(은)○ ○鎬(호)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浚(준)○ ○東(동) 炳(병)○ ○坤(곤) 鎭(진)○ ○泳(영)        

 

 

시랑공(侍郞公) 휘 문백(文伯)파

二三세 二四세 二五세 二六세 二七세 二八세 二九세 三○세 三一세 三二세
    楨(정)○ ○燁(엽) 在(재)○ ○鎬(호) 泳(영)○ ○根(근) 熺(희)○ ○坤(곤)
    榮(영)○ ○燮(섭) 栽(재)○ ○鉉(현) 濬(준)○ ○柄(병) 煥(환)○ ○埈(준)
三三세 三四세 三五세 三六세 三七세 三八세 三九세 四○세 四一세 四二세
鏞(용)○ ○洛(락) 相(상)○ ○熙(희) 載(재)○ ○鉉(현)        
鐸(탁)○ ○漢(한) 榮(영)○ ○烈(렬) 基(기)○ ○鎭(진)        

 

 

■ 김녕김씨 과거 실존 인물 (고려/조선 시대 인물)

 

김시흥(金時興): 김녕김씨(金寧金氏)의 관조로,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35세손이자 경순왕 8세손이다. 고려 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병부시랑 동북면 병마사(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 묘청(妙淸), 조광(趙匡) 등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정당문학광록대부 평장사(政堂文學光祿大夫平章事)에 이르렀다.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김향(金珦): 김녕군 시흥(時興)의 아들로, 고려 인종조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시호는 원정(元靖)이다.


김극세(金克稅): 원정공(元靖公) 향(珦)의 아들로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거쳐 대광첨의찬성사(大匡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김중원(金重源): 호는 미국(楣谷), 극세의 아들이다.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형부시랑,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였다.


김중보(金重輔): 극주의 아들로 정승성 정승(政丞省政丞)을 지냈으며 시회는 문간(文簡)이다.


김귀갑(金貴甲): 중원(重源)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역임하였다.


김현(金峴): 중원(重源)의 아들이며 중정대부 직문하(中正大夫直門下)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김문제(金文齊): 중후(重後)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전라도 출척사(全羅道黜陟使) 및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냈고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김정병(金廷丙): 호는 회은(晦隱), 귀갑(貴甲)의 아들이다.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병부상서(兵部尙書) 등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김정신(金挺申): 귀갑(貴甲)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순대부 전공사판서(正順大夫典工事判書)를 지내고 분성군(盆城君)에 봉군되었다.


김광저(金光儲): 자는 화중(華中), 호는 농암(壟岩)이다. 현(峴)의 아들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하였다.


김윤달(金潤達): 호는 호정(浩亭), 정병(挺丙)의 아들이다. 한림학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김질(金秩): 호는 송암(松菴), 정신(挺申)의 아들이다. 고려가 망하자 도고산(道高山)에 낙향, 태조 이성계가 옛정을 생각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김순(金順): 자는 창여(昌汝), 호는 퇴휴당(退休堂) 광저(光儲)의 아들이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김천익(金天益): 일성(鎰成)의 아들로 문과급제하여 추밀원 좌승지(樞密院左承旨), 상장군(上將軍),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개녕군(開寧君)에 봉군되었다.


김익생(金益生): 호는 성재(省齋), 질(秩)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1405(태종5)년에 왕명으로 효자정려가 내렸다. 남포진병마절제사(南浦鎭兵馬節制使)를 거쳐 명나라 황태자 책봉에 진하사(進賀使), 경상병마절제사(慶尙兵馬節制使), 한성부윤(漢城府尹),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고,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김관(金觀): 호는 수헌(睡軒), 호판공(戶判公) 순(順)의 장자이다.. 충의공(忠毅公) 문기(文起)의 아버지이다. 호분위사좌령사직(虎賁衛司左領司直)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 받았고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김지(金智): 호판공(戶判公) 순(順)의 아들로 세종 때 벼슬길에 나가 통훈대부 군자감정(軍資監正)과 가선대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였다. 1456년 단종사화(端宗士禍) 때 장질(長姪)인 충의공(忠毅公) 문기와 현석(玄錫) 부자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산수와 풍월을 벗삼아 농사짓고 낚시로 일생을 마쳤으니 사람들은 공의 절의를 칭송하였다.


김존일(金存一): 이조판서 천익(天益)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효온(金孝溫): 자는 백원(伯源), 지(智)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김효신(金孝信): 지(智)의 아들,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이조참판(吏曹參判),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준(金遵): 자는 응원(應遠)이며, 호는 만지당(晩池堂)이며 운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숙공 안숭선(安崇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숙공의 사위가 되었다. 세종 때 병조판서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 에 이르렀다. 장인 안숭선이 고흥으로 도임(到任)할 때 따라가서 지금의 과역면 가산리에 정주하고 못을 파 연꽃을 심어 고기를 기르며 호를 만지당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 관직이 영돈녕부사에 이르렀으나 사종숙이신 백촌 김 문기 종숙께서 사육신과 함께 순절, 서울 필동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고흥군 과역면 가산리에 내려오시어 세속을 끊고 지내오시다가 단종이 승하하셨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월악산에 올라 통곡하시면서 충신으로서의 예를 모두 치루시었다. 세조가 좌의정 벼슬을 권유하였으나 고사하시고 구치잠과 계자서를 지어 지역 유림과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셨다.


김현석(金玄錫): 호는 여병재(如甁齋)로 아버지는 충의공(忠毅公) 문기(文起)이다. 생원시험에 합격하고 거창현감(居昌縣監)과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지냈는데 단종사화(端宗士禍) 때 아버지와 같이 순절하였다. 천성(天性)이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정직하였다. 항상 군민(郡民)들을 사랑하고 청백하였다. 거창(居昌)에 송덕비, 영월에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김충주(金忠柱): 호는 탄옹(炭翁), 문기의 손자로 단종사화로 형제들과 예속(隸屬)되어 가다가 마하산(麻霞山)에 숨어 살며 숯을 구워 연명하였다. 단종이 계신 영월쪽을 바라보면 바위에서 울었다 하여 망월암(望越岩)이 있고, 눈물을 소나무에 매양 뿌려 소나무가 말라죽어 고송정(古松亭)이라 하였다. 고종 7년 효자정려가 내려졌으니 조부 충의공부터 5대가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 오정각(五旌閣)이라 부른다.


김구룡(金九龍): 자는 회운(會雲), 호는 봉계(鳳溪)로 영돈녕부사를 지낸 준(遵)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사헌부지평을 지낸 원경(元慶)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 이조정랑, 자헌대부행병참판(資憲大夫行兵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준영(金俊榮): 자는 태진(泰晋), 호는 동악(東岳), 돈녕부지사 분산군(盆山君) 석숭(錫崇)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2세의 고령인데도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임금의 어가를 시위하여 무사히 피난시켰으며, 다시 한양으로 환도할 때도 역시 어가를 끝까지 지성으로 시위하여 무사히 환도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공의 공적을 높이 찬양하여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분성군(大匡輔國崇祿大夫盆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숙종은 충신정려와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부조묘에 모시라는 은전을 내렸다.


김영년(金永年): 자는 경로(敬老), 호는 겁암(怯岩)이며 명지(明之)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호벌치(胡伐峙)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찬(撰)한 《회맹록호남절의록(會盟錄湖南節義錄)》에 기록되어 있다.


김복룡(金福龍): 유광(有光)의 아들이다. 선조 때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졌다.


김경의(金敬義): 호는 매헌(梅軒), 인선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해남현감을 거쳐 형조참판, 훈련원지훈련원사(訓練院知訓鍊院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김응수(金應壽): 자는 남로(南老), 분릉군 김복룡(金福龍)의 아들이다. 임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어가를 시위하였다.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충좌위 부호군(忠佐衛副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삼등에 녹훈되었고,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증직되었으며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에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복증(復贈)되었다.


김유부(金有富): 호는 어초와(魚樵窩),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윤원(允元)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업고 팔공산(八公山), 밀양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이등원종공신(宣武二等原從功臣)이 되고 사후 좌승지겸경연참찬관(左承旨兼慶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김정구(金鼎九): 호는 치옹(痴翁)이며 병조참판 계원의 아들이다. 충좌위사정(忠佐衛司正)을 지내고 공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김경세(金景世): 자는 현보(賢甫), 호는 계은(溪隱)이며 귀중(貴中)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를 지냈고, 1636(인조 14)년 2월 청나라가 침입하여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니 공주(公州)로 가서 청군과 여러 번 싸워 전공을 세웠으나 광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순조는 공의 처와 장자를 칭찬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주었다. 시림영원 분성여예 가풍세덕 부충부열(始林靈源 盆城餘裔 家風世德 夫忠婦烈 : 성스러운 시림에서 나신 분을 근원하여 분성군 후예이라. 가풍은 대대로 덕을 쌓으니 지아비는 충신이요, 아내는 열녀일세) 순조 때 충신정려의 왕명이 내렸고, 통정대부 좌부승지겸 경연참찬관 규장각직제학(通政大夫佐副承旨兼經筵參贊官奎章閣直提學)을 증직받았으며 상산군(常山君)에 붕군되고,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오위도충부도총관에 추증되고, 충경(忠敬)의 시호를 받았다.


김흔(金欣): 자는 덕경(德卿), 호는 금은(錦隱)으로 수동(秀棟)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에 오르고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증직하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몽상(金夢祥): 아버지는 분성군 응수(應壽)이다. 임란 때 선조 임금의 의주 피난길을 시위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르고 분흥군(盆興君)에 봉해졌다.


김언공(金彦恭): 자는 효즉(孝則), 호는 묵재(?齋) 또는 묵헌(?軒)으로 아버지는 제용감첨정 상걸(商傑)이다. 어려서부터 경서와 시에 능통하였고 23세에 향시에 으뜸으로 뽑혀 뒤에 순천부사(順天府使)에 올랐으며, 무과에 합격한 후 아버님의 삼년상을 마친 다음 판관 벼슬에 올랐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출정하여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다.


김귀희(金貴希): 자는 희서(希瑞), 호는 노곡(魯谷)으로 덕해(德海)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동으로 불렸으며 커서는 완력과 담력이 세고, 지략이 뛰어나 1591년 장사군관(壯士軍官)에 뽑혔다.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순찰사 김수의 막료로 왜적과 싸웠고, 고향에 돌아와 의병에 가담하여 영천성(永川城) 수복에 공을 세웠다. 그 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晋)의 전부총장(前部摠將)이 되어 경주의 적을 추격하여 계연에서 대파하였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에 올랐다. 공의 실기(實記)인 《노곡실기》에 〈용사일기(龍蛇日記)〉가 전한다.


김세좌(金世佐): 형조판서를 지내고 분계군(盆溪君)에 봉해졌다.


김석산(金碩山): 자는 성관(聖寬), 호는 잠헌(箴軒), 변란을 평정하고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임해군(臨海君)에 봉군되었다.


김치규(金致奎): 초명은 치범(致範), 자는 여홍(汝弘)으로 익보(益寶)의 아들이다.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을 역임하였고 1849(헌종 15)년에 가락국의 김수로왕 후손을 선김해(先金海),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신라의 경순대왕 후손을 후김해(後金海)로 불러 왔기에 혼돈으로 여러 가지 지장을 초래함에 경순대왕 계열인 김녕군(金寧君) 시흥(時興)의 후손은 관향을 김녕(金寧)으로 갖게 해달라고 예조에 경상도 유학(儒學)들과 앞장서 탄원서를 냄으로 본관을 김녕김씨로 쓰게 되었다.


김치일(金致一): 자는 관여(寬汝), 호는 경은(耕隱)으로 익보의 아들이다. 동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을 역임하였고 효행이 뛰어나 《품천지(品川誌)》와 《금릉군지》에 기록되었다.


김진행(金鎭行): 자는 윤서(允瑞), 광옥(光玉)의 아들이다. 효행이 뛰어나 1893(고종 30)년 효자정려의 왕명을 받았고, 증조봉대부 동몽교관(贈朝奉大夫童蒙敎官)이 되었다. 한국씨족통보 《만성보(萬姓譜)》에 김녕김씨로써는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용식(金溶軾): 고종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기명(金沂明): 자는 성오(聲五), 호는 화계(華溪)로 규상(奎相)의 아들이다. 1859년 무과에 합격하여 1866년 훈련원도감(訓練院都監)으로 있을 때,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의 목을 베어 바치는 큰 공을 세우고 승리하니 고종은 영장(營將)으로 승진시키고 공의 이력을 어병(御屛)에 제명(題名)하고 웅천현감(雄川縣監)에 제수하였다. 1863년 어전무술대회(御前武術大會)에서 이름을 떨쳐 강화도중군(江華島中軍)이 되었으며 다대진수군절제사(多大津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김도현(金道鉉): 호는 벽산, 성하(性河)의 아들이다. 한말 의병장으로 영해대진(領海大津) 앞바다에서 순절하였다.


김근배(金根培): 자는 광원(光元), 아버지는 현교(顯敎)이다. 겨우 7살 때 백재(柏齋) 김상호(金尙鎬)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고, 총명하여 일찍이 문장이 뛰어나 여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20세에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1908년 삭발령이 내리자 탄식하며 이르기를 “부모님의 유체를 훼상하고 선왕의 법복을 바꾸어 입은 것은 야만인의 풍속이라. 나는 차마 못하겠다.”하며 자취를 감추기도 했지만 망국을 슬펴하다 자결하였다.


김기남 · 김난생 형제: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

 

 

■ 현대의 김녕김씨 인물 모음

 

 

김형광(국회의원)  /  김형민(정치인)  /  김형책(아나운서) / 김재규(전 군인-군사령관, 보안사령관 & 전 건설부장관 & 전 중앙정보부장)  /  김진재(기업인, 정치인)  /  김진표(정치인)  /  김진태(국회의원, 전 검사)  /  김진태(전 검찰총장)  /  김진산(기업인)  /  김환(기자, 축구 해설가)  /  김영삼(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  김석수(전 국무총리)  /  김광연(야구선수)  /  김봉연 (전 야구선수 & 교수)  /  김광연(사업가)  /  김명연(국회의원)  /  김희연(사업가)  /  김유리(작가)  /  김현철(정치인)  /  김승관(롯데자이언츠 드림팀 코치)  /  김법린(승려, 전 문교부 장관)  /  금난새(지휘자)  /  김병조(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중 1명)

 

김진규(배우)

김녕김씨-김진규-배우
김진규(배우)

 

김형일(배우)

김녕김씨-김형일-배우
김형일(배우)

 

김형자(배우)

김녕김씨-김형자-배우
김형자(배우)

 

김진표(가수)

김녕김씨-김진표-가수
김진표(가수)

 

김종인(가수-그룹 EXO의 멤버_카이)

김녕김씨-카이-가수
카이(가수)

 

김준현(개그맨)

김녕김씨-김준현-개그맨
김준현(개그맨)

 

김희선(배우)

김녕김씨-김희선-배우
김희선(배우)

 

김설현(가수_걸그룹 AOA멤버)

김녕김씨-설현-가수
설현(가수_그룹 AOA)

 

김지현(가수_그룹 드림노트 멤버_유아이)

김녕김씨-유아이-가수
김지현(가수_드림노트 유아이)